“암 치료만으로도 벅찬데 심장약까지 먹으라니,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죠. 항암 치료 스케줄과 수술 과정을 버티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란 말에 힘을 냈습니다. ”
올해 초 이대목동병원 심장종양클리닉 외래 진료실. 유방암 진단 후 4개월에 걸친 항암치료와 수술 끝에 ‘병리학적 완전관해(pCR, pathologic Complete Response)’ 판정을 받은 서경자(가명·52) 씨가 김민정 순환기내과 교수의 손을 맞잡고 고마움을 전했다. pCR은 수술로 절제한 유방과 림프절 조직에서 침윤성 암세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상태다. 유방암 환자의 예후를 예측하는 인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pCR에 이른 환자는 기존 병기에 비해 재발률이 현저히 낮고, 생존율이 높다.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서씨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심장 판막의 여닫는 기능에 문제가 생겨 가슴을 열고 손상된 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았다. 한숨 돌리려던 찰나, 유방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주치의는 선행 항암 화학요법으로 종양 크기가 줄면 유방 전체를 들어내는 전(全) 절제술 대신 종양과 종양 주위 일부만 없애는 부분 절제술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고, 안트라사이클린 계열 항암제와 트라스트주맙 성분 표적항암제를 병행하는 항암 치료 스케줄이 잡혔다. 단, 주치의는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안트라사이클린이 심장 독성을 갖는 대표적인 항암제인 데다 기저 질환이 있는 만큼, 순환기내과 진료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것. 서씨는 반신반의하며 심장종양클리닉의 문을 두드렸다. 김 교수는 심초음파 검사 등 종합적인 평가를 거쳐 서씨를 중등도 이상의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집중 관리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몇 달 지나기도 전에 온몸이 붓더니 숨찬 증상이 나타났다. 김 교수는 “우리 몸의 펌프 역할을 하는 심장 기능이 떨어지면서 폐에 물이 고이는 폐부종이 발생했다는 신호”라며 “심부전 약물을 추가로 복용하면서 한 달 간격으로 진료를 보자”고 제안했다.
항암제는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강력한 무기지만, 특정 계열은 심장 근육 세포에도 치명적인 스트레스를 가한다. 서씨와 같은 유방암과 림프종에 흔히 쓰이는 안트라사이클린 계열이 대표적이다. 의학계에 따르면 안트라사이클린 계열 항암제로 치료받은 환자는 암에 걸리지 않았던 일반인 대비 심부전 발생 위험이 평균 3배가량 높다. 여기에 트라스트주맙 성분 표적항암제까지 병용하면 위험이 약 4~7배까지 치솟는다. 어릴 때 항암치료를 받았던 소아암 환자가 성인이 됐을 때 심부전이 발생할 위험이 건강한 일반인의 15배 이상에 달했다는 장기 추적 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 기저 질환이 있는 경우 심장 기능이 예상보다 빨리 저하되거나 심근염, 부작용, 급섬 관상동맥증후군 등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기기 쉽다. 계획된 항암 치료를 소화하지 못한 채 일시 중단하거나 심장 근육에 비가역적인 손상이 발생해 암이 완치되고도 평생 심부전과 같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종료되기까지 심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면밀하게 모니터링해야 하는 이유다. 항암 치료 일정이 반복되고 심장에 쌓이는 부담이 커지자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잠이 안 오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나더니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심장클리닉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서씨에게 증상을 전해들은 김 교수가 심전도 검사를 실시하자, 부정맥의 일종인 발작성 심실상성 빈맥(PSVT)이 그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부정맥은 발생 순간을 놓치면 진단 자체가 어려운 질환이다. 주사제를 투여한 즉시, 심박수가 안정됐고 서씨는 또 한차례의 고비를 넘겼다. 항암 치료 일정과 별개로 한 달에 한번씩 빠짐없이 심장종양클리닉을 찾아 순환기내과 전문의와 긴밀하게 소통한 결과 서씨는 선행화학요법 스케줄을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완주했다. 종양 크기를 줄인 뒤 수술한 덕분에 수술 범위도 크게 줄었다. 서씨는 지금도 3개월마다 클리닉을 찾아 심장 상태를 점검하며 건강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한심장학회 심장종양학연구회가 2005~2022년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를 토대로 한국 암환자의 심혈관질환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암 진단 후 1년 이내 암 특이 사망률이 43% 감소한 반면 심혈관 사망률은 거의 줄지 않았다. 암 치료 기술의 발전으로 암 자체보다 심혈관질환에 의해 사망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암 환자에서 새롭게 발생한 허혈성 심질환과 뇌졸중은 각각 43%, 39% 감소한 데 반해 심부전 발생률은 56%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대목동병원에서 2025년 선제적으로 심장종양클리닉 운영에 나선 배경이다. 김 교수는 “항암 치료를 하다가 심부전이 너무 악화된 상태에서 발견되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심장 기능을 회복하는 데 최소 3~4개월이 걸린다”며 “암 진단 시점부터 체계적인 심혈관질환 관리가 이뤄지면 항암 치료를 중도에 멈추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연 없는 ‘패스트트랙 협진’이 가능하다는 게 심장종양클리닉의 가장 큰 강점이다. 유럽심장학회(ESC)가 2022년 처음 발간한 심장종양학 가이드라인에도 “다학제 간 소통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항암 치료 중단을 최소화하라”는 권고가 담겼다. 그는 “암세포를 없애는 것만이 암치료의 전부가 아니다”라며 “암환자들이 끝까지 치료를 완주할 수 있도록 든든한 심장 지킴이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