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미국·이란 전쟁이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 전체에 구조적 전환이라는 숙제를 던졌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반도체·철강·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제조업을 국가 경제의 중추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막상 핵심 에너지는 중동 등 일부 국가에 의존하는 ‘최저가’ 중심의 효율 추구형 경제구조가 이란 전쟁 이후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3일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 전반에 안정적인 에너지와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안보 비용’이 추가될 것”이라며 “우리 산업이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짜야 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원유 의존도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는 지리적 근접성과 가격 경쟁력을 이유로 중동산 원유를 주로 사용해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의 대중동 원유 수입 비중은 69.1%에 달한다. 미국(17%)을 제외하면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이라크·쿠웨이트·카타르 등 중동 국가들이 10년째 수입국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경제성에 기반한 측면이 크다는 지적이다. 유광호 대외연 전문연구원은 “중동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전 세계 평균 대비 약 1.12달러, 미국산 대비로는 약 2.06달러의 운송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원유 수입량은 약 9억 3500만 배럴이다. 수송 비용만 따져도 1조 5000억~2조 7000억 원(2025년 평균 환율 적용)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운송 기간이 짧고 국내 정유 설비가 중동산 중질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다는 점도 중동 의존도를 고착화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미국·이란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수급 위기는 이 같은 구조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원유의존도(GDP 100만 달러당 원유 소비량)는 5.63배럴로 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1위다. 높은 의존도에 더해 수입선까지 중동에 쏠려 있다 보니 지정학적 리스크에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실제 호르무즈해협 봉쇄 여파로 원유뿐 아니라 나프타 수급까지 흔들리면서 산업 전반에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나프타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플라스틱과 합성섬유·포장재 등 산업 전반의 비용 부담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경제·산업정책의 방향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이번 기회에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 구조를 재설계하겠다고 전환을 서두르는 것은 오답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재생에너지 전환도 필요하지만 산업의 쌀인 에틸렌 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단순히 태양광으로 전기를 더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공급망 안정성과 지정학적 리스크를 반영한 ‘안보 비용’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조달 전략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등 동맹국을 포함한 비중동 지역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에너지를 산업·안보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국내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배터리·조선업 등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와 경제 안보 협력 차원에서 현지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국내 석유 설비투자가 전부 중동산 중질유에 맞춰져 있어 미국산 등 다른 지역의 경질유를 쓰려면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해 한꺼번에 낮추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산업 경쟁력을 고려했을 때 정유 비용을 일부 더 부담하더라도 중동 원유 의존도를 50%대까지 낮추는 것은 가능해보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와 같은 가스전 개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신현돈 인하대 에너지자원학과 교수는 “국내 대륙붕 개발이 성공하면 2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가스 비축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라며 “에너지 수입원을 다양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직접 해외 자원 개발을 추진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