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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원전 한 번 가시죠

29.10.2026 1분 읽기

한영일

논설위원

일주일 전 전북 익산 왕궁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 한 손님이 깜짝 등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이었다. 학생들과 짐볼 옮기기 경기에 참여하고 이어달리기 결승선 테이프를 잡으며 아이들을 응원했다. 운동회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교사들과 작은 학교의 중요성과 지역 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소탈한 풍경 뒤에는 지방소멸이라는 묵직한 국가적 과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국정의 우선순위와 정책의 방향이 담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인 지난해 6월 11일 한국거래소를 찾아 주가조작 근절 의지를 밝혔다. 올해 5월에는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조선산업의 미래를 논의했고 지난 20일에는 인천 계양 공공주택 현장에서 주택 공급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취임 이후 수십 차례의 ‘행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의 에너지 안보와 첨단산업의 미래가 걸린 원전 현장에도 대통령의 발길이 닿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국회의원, 당 대표를 거쳐 국가수반에 오르기까지 원전 현장을 공식 방문한 적이 없다. 원전보다 재생에너지 확대에 무게를 둬온 진보 진영의 정책 기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대통령’을 선언한 이상 시선이 지지층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원전 현장에서 국가의 에너지 전략을 제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8년 고리 1호기 준공식에 참석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신고리 원전 건설 현장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원전을 수출산업으로 키울 방안을 논의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신한울 1·2호기 종합 준공 및 3·4호기 착공식에서 원전 생태계 정상화를 강조했다. 탈원전을 추진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해외 원전 건설 현장을 찾은 바 있다.

원전의 위상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 국민 인식도 변했다.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이 올해 6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9%가 신규 원전 건설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지난해 국내 원자력발전량은 184.7TWh(테라와트시)로 전체 발전량의 약 31%를 차지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안정적인 전력 공급 없이는 국가의 미래마저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한때 원전과 거리를 뒀던 유럽마저 다시 ‘원전 앞으로’를 외치는 이유다. 한미 간 대규모 투자 협력에서도 원전 건설이 주요 사업으로 거론될 정도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원전을 바라보는 지역의 시선마저 바꿔놓았다. 경북 영덕에서는 신규 원전 유치에 사활을 걸어 결국 부지로 낙점됐다. 과거라면 주민 반발부터 불렀을 원전과 방사성폐기물 처분 시설이 이제는 지역의 생존을 위한 투자 기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인구감소와 지역 경제 붕괴라는 절박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게 원전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이냐, 소멸이냐의 갈림길에 놓인 선택이다. 대통령이 그 절박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만으로도 현장 방문의 의미는 충분하다.

대통령의 원전 방문은 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여전히 탈원전을 중시하는 전통적 지지층에도 달라진 에너지 현실을 직시하고 정책의 유연성을 받아들이자는 신호가 될 수 있다. 실용주의는 익숙한 길을 걷는 데서 증명되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불편해하는 현장까지 찾아가 현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마침 정부는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원전 공론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된다. 시민참여단의 숙의 과정에서는 원전을 늘리거나 줄인다는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고 쟁점별로 필요한 조건과 수준을 따져 묻는다고 한다. 대통령의 현장 방문도 공론화의 결론을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자리가 될 필요는 없다. 원전의 가능성과 한계를 직접 살피고 국민적 합의를 책임 있게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의 에너지 선택은 다음 세대의 산업과 일자리, 지역의 운명까지 좌우한다. 대통령이 원전 현장에서 전력과 산업, 지역의 삶을 아우르는 ‘에너지 실용주의’를 보여줘야 하는 이유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원전을 반대하면 진보, 지지하면 보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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