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 가 베트남에 대규모 반도체 테스트 팹(Fab)을 짓는 것은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장 속에 급증하는 메모리반도체 수요에 대응해 수출 거점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국내에 집중된 테스트 팹을 해외에도 구축해 글로벌 고객사에 메모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출 기지를 다변화하는 구상이다.
서울경제신문이 5일 확보한 삼성전자의 타이응우옌성 인민위원회 제출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3월 베트남에 반도체 후공정 법인인 삼성베트남세미컨덕터(SVS)를 설립했으며 타이응우옌 옌빈산업단지 CN-11·CN-12 구역에 반도체 테스트 팹을 건설하고 있다.
부지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생산시설과 같은 단지에 위치하며 면적은 축구장 37개 규모인 26만 5895㎡에 달한다. 옌빈산단은 간선도로를 비롯해 노이바이국제공항과 항만으로 이어지는 물류망을 갖추고 있다. 하루 15만 ㎥ 규모의 용수시설과 하루 8만 ㎥ 규모의 폐수처리시설 등 산업 기반시설도 마련돼 있다.
총 2기로 계획된 베트남 팹의 총투자 규모는 105조 7944억 동(약 5조 48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삼성 계열사 조달 자금이 전체의 34.6%, 투자자 출자금이 2.5%를 차지한다. 나머지 66조 6401억 동(약 3조 4500억 원)은 향후 현지 사업에서 이익이 나면 이를 재투자해 충당한다. 금융기관 차입 없이 베트남 반도체 사업을 단계적으로 확장하며 키우겠다는 의미다.
양산 일정도 구체화됐다. 삼성베트남세미컨덕터 1공장 1층 생산 라인(V1)은 내년 7월 장비 반입을 시작해 같은 해 4분기 중 공식 가동한다. 2층 생산 라인(V2)은 2028년 5월 장비를 반입해 같은 해 10월 가동한다.
반도체 테스트 팹은 웨이퍼에 메모리 회로를 만드는 전공정 팹과 달리 패키징된 D램과 낸드를 고객사로 출하하기 전 최종 검사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메모리에 전기 신호를 넣어 정상 속도로 데이터를 읽고 쓰는지 확인하고 고온·고전압 등 가혹한 환경에서도 오류가 없는지 검증한다. 이 과정에서 불량품을 걸러내고 품질 기준을 통과한 제품만 고객사로 출하한다.
삼성전자가 해외에 메모리 테스트 팹을 조성하는 배경에는 수출 경로를 다각화해 공급망 대응력을 높이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 국내 테스트 거점인 천안·온양캠퍼스에서 노사 문제나 재해·사고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베트남에서 수출 물량을 일부 소화해 공급 차질을 최소화하겠다는 포석이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관세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베트남에 별도 수출 거점을 확보하면 고객사의 지역에 따라 출하 경로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번 투자를 발판으로 삼성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공정별 역할을 세분화하며 한층 입체적으로 재편된다. 첨단 메모리 전공정 팹은 평택·용인·전남광주 등 국내 거점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한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팹은 미국 텍사스를 중심으로 글로벌 빅테크 대응력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 후공정 팹은 천안·온양과 중국 쑤저우에 이어 베트남 타이응우옌에 구축되는 상황이다.
특히 베트남이 반도체 사업장으로 낙점된 배경에는 삼성전자가 10년 넘게 현지에서 촘촘한 제조·물류 인프라를 닦아온 것도 한몫했다. 삼성전자는 2013년부터 타이응우옌에 스마트폰 공장을, 2015년부터 호찌민에 가전 생산시설을 운영해왔다. 삼성SDS는 하노이·호찌민 물류 거점과 노이바이국제공항을 잇는 항공물류 합작법인 ALS SDS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삼성전기(009150) 가 지난달 타이응우옌 옌빈산단에 AI 반도체용 패키지기판(FC-BGA) 생산시설을 짓기로 하고 2조 51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면서 삼성의 베트남 사업은 AI 반도체 밸류체인으로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주승환 인하대 제조혁신전문대학원 교수는 “삼성전자 베트남 사업장이 저임금에 기댄 스마트폰·가전 조립 기지에서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며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삼성의 미래가 걸린 고부가 제품은 천안·온양에 모으고 범용 메모리는 베트남으로 넘기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테스트 팹의 안정적 양산을 위해 현지 인력 육성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는 7월부터 베트남 현지 엔지니어 103명을 천안·온양사업장으로 파견해 반도체 실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삼성의 신입 엔지니어 육성 프로그램(SEED)을 활용해 베트남 팹 가동에 필요한 공정·설비 운용 인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베트남 근로자가 국내 반도체 사업장에서 SEED를 통해 교육받는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생들은 삼성의 베트남 스마트폰 생산 거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공학 계열 학위 취득자들이다. 이들은 천안·온양사업장에서 삼성의 반도체 엔지니어들과 멘토·멘티 관계를 맺고 실제 생산 라인을 경험하며 메모리 테스트 공정과 설비 운용 노하우를 익히고 있다. 교육생들은 이후 베트남으로 복귀해 현지 테스트 팹의 초기 구축과 양산 안정화를 주도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