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과 운하, 공장과 단일 경작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구축한 산업적 인프라는 자연환경을 바꿔놓았고, 그곳에서 번성한 생물들은 다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세계적인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 등이 공동 저자로 참여한 ‘패치 인류세’는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다른 생명체, 나아가 무생물까지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바라보도록 이끄는 현장 안내서다. 인류세(人類世)는 인류가 지구 지질이나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주목해 제안된 지질 시대의 구분 중 하나다.
핵심 개념인 ‘패치 인류세’는 인류세의 변화가 지구 전체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각보처럼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다양한 규모와 형태로 일어난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거대한 데이터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생태계의 변화를 역사적 사례와 현장 탐사를 통해 들여다본다. 인간의 산업 활동과 생물의 이동, 지역 주민의 삶이 어떻게 얽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내는지도 세밀하게 추적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환경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 오히려 인간의 예측과 통제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 아래 하노이에 건설된 현대식 하수도는 백인 거주지에 쥐가 더 많이 출몰하는 역설을 낳았다. 관상용으로 인기를 끌었던 부레옥잠은 수로와 운하에서 번식해 골칫거리가 됐고, 미국 황소개구리는 토종 생태계에 위협을 가했다. 후쿠시마에서 유출된 방사능 역시 바람을 타고 멀리 이동했다.
특히 저자들은 이처럼 인간이 만든 경계에서 벗어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 존재를 ‘이탈(feral)’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생물뿐 아니라 이산화탄소와 방사능 같은 물질도 인간의 통제를 넘어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인류세는 인간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시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이 다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시대이기도 하다.
책은 인류세를 거대한 지구적 위기로만 바라보는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그 변화를 관찰하라고 제안한다. 인간과 인간 외 존재를 함께 바라보는 ‘인간 너머’의 관점은 자연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온 기존의 사고에 질문을 던진다. 2만 4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