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다양성은 파괴다!’ ‘남자를 다시 남자로’
2023년 8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다시 깨어나는 미국(ReAwaken America)’ 행사장은 이런 구호가 적힌 모자와 티셔츠를 착용한 백인 남성들로 가득했다. 연단에 선 연사는 “자유주의자, 민주당원, 공산주의자 등 사탄의 졸개들이 이 나라를 움직이려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 기독교 성향의 행사장 곳곳에는 독수리와 십자가, 예수의 이미지가 더해진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탐사 전문 저널리스트인 캐서린 스튜어트는 신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에서 미국 극우 세력의 반민주주의 운동이 어떻게 조직되고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추적한다. 저자는 미국 보수 기독교 단체와 정치권의 유착 관계를 15년 넘게 취재해 왔다. 책의 미덕은 저자의 발품이 빚어낸 밀도 높은 현장성이다.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보수 집회 현장은 물론 활동가들의 비공식 모임, 강경 교회의 예배당을 직접 찾아 반민주주의 운동 지도자 및 지지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한다.
저자는 미국 반민주주의 운동의 주체를 막연히 ‘극우’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대신 주요 행위자를 자금 제공자, 사상가, 하사관, 보병, 파워 플레이어 다섯 부류로 구분해 각자의 역할과 이해관계를 분석한다. 자금 제공자는 부의 불평등을 이용해 영향력을 키운 초부유층으로 민주주의를 부수는 일이 부의 창출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테크업계 거물부터 에너지·부동산 재벌, 월가 헤지펀드 운용자, 유명 기업 상속자까지 면면이 다양하다. 부자들이 낸 돈을 이데올로기로 바꾸는 역할은 사상가가 맡는다. 이들은 헤리티지 재단, 클레어몬트 연구소 같은 보수 성향 싱크탱크에 주로 소속돼 있다. 하사관은 대중을 조직하는 운동의 실무진으로 미국 보수 교회에 있는 수만 명의 목사가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파워 플레이어는 자신들의 의제를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동원해 막대한 권력을 축적한다. 이들은 수천만 또는 수억 명의 보병에 닿는 미디어와 목회 네트워크를 지휘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들 반민주주의 세력이 지목하는 악의 근원은 ‘워크(Woke)’ 엘리트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워크는 ‘깨어 있다’는 뜻으로 미국 우파가 좌파 진영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다. 워크 엘리트들 때문에 흑인보다 더 차별받는 백인, 무슬림보다 더 차별받는 기독교인, 여성보다 더 차별받는 남성이 생기고 있다는 게 우파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러한 반민주주의 운동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기독교 민족주의’를 꼽는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주된 희생자라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기독교를 믿는 백인 남성만이 국가를 통치할 자격이 있으며 무법천지인 세계를 바로잡을 강권적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세계관을 공유한다.
책은 단순히 반민주주의 세력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해법도 제시한다. 저자는 특히 자신들이 ‘진짜 미국인’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반민주적 세력이 실제로는 치밀한 조직화와 동원을 통해 영향력을 키워온 소수 집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이들은 이해관계와 생각이 제각각인 이질적인 집단이라는 한계도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다수를 하나로 묶을 ‘빅 텐트’를 세우고 그에 걸맞은 조직과 동원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울러 정교분리 원칙을 강화하고 사법부를 바로 세우며 국민의 투표권을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역설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가짜 뉴스의 확산, 정치와 종교의 결탁, 남녀·세대와 빈부를 갈라치는 정치 등 비슷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단 한 번의 쿠데타나 독재자의 등장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돈과 조직,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448쪽, 2만 8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