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관세부과 명분으로 삼은 과잉생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연 공청회에서 한국 정부가 현재 자발적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의 통상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국 정부로서는 ‘시장 자율’이라는 원칙을 앞세우면서도 실질적인 구조조정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됐다.
5일(현지 시간) USTR이 워싱턴DC 미 국제무역위원회(ITC) 사무실에서 개최한 무역법 301조 조사 공청회에서 한국 정부 대표단은 “한국 산업 구조는 시장 경제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아울러 정부 차원에서도 산업계 구조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을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2016년 시행된 기업회생법, 올 4월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 특별법 시행령’ 등을 통해 석화 업계의 자율 구조조정을 유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미 양국 산업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한편, 지난해 체결된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를 기반으로 제조업 등 분야에서 양국 협력이 한층 확대될 것이라는 점도 적극 어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공청회는 미국이 연방 대법원의 상호관세 위법 판결 이후 대체 관세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착수한 무역법 301조 조사의 일환이다. 미국은 이번 조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관세 부과를 비롯한 대응 조치를 결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압박하는 석화 과잉생산, 업계 자율로 구조조정 속도 더뎌
한국 정부가 자율 구조조정을 내세웠지만, 업계 현장의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미국의 301조 조사 자체가 중국산 저가 석화 제품이 한국을 경유해 우회 수출된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만큼, 한국으로서는 ‘우리도 피해자’라는 논리를 펴면서 동시에 자국 산업의 체질 개선을 증명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다. 지난해 8월 정부와 업계는 나프타분해설비(NCC) 생산량을 최대 370만t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여수·대산·울산 전국 3대 산단별 사업재편안 제출이 마무리됐으며, LG화학은 여수산단에서 GS칼텍스와 합작법인(JV) 설립 및 노후 1공장(연산 120만t) 폐쇄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산단지에서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올 하반기 합자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있으나, 울산과 여수 단지는 설비 통합 및 생산 구조조정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이번 구조재편으로 2026년 산업생산이 최대 6조7000억원 감소하고 고용도 최대 5200명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전문가들은 중국·중동의 공급 과잉과 미국 셰일가스 확대라는 구조적 압박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율 구조조정만으로 미 행정부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사 간 갈등과 각 대기업 간 조율이 구조조정 속도를 늦추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어, 미국과 협상 과정에서 이 부분이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관세 안풀리는 미국 디지털 무관세 추진…게임 등 한국도 관련
한편 미국은 한국·일본 등과 손잡고 이른바 ‘디지털 무관세’ 조치를 독자 추진할 계획이라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선진국 진영에 맞서 브라질·튀르키예 등 세수 감소를 우려하는 중진국들이 반발하며 세계무역기구(WTO) 내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이 독자적인 대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WTO 회원국이 미국의 제안에 합류할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웹툰·게임 등 디지털 콘텐츠 수출을 주력으로 한다는 점에서 관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