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에 거주하는 60대 A 씨는 최근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데다 자녀들까지 독립하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무기력감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TV만 보는 날이 많아졌고 식사량이 줄면서 체중도 크게 감소했다. A 씨는 “회사에서도, 자녀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낮에는 심장이 두근거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이러다 죽을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고 말했다.
우울증·불안장애 진료비가 지난해 처음으로 1조 원을 돌파하는 등 국민 정신건강이 빠르게 악화하는 가운데 올 들어서도 우울증 환자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연간 환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120만 명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60세 이상 고령층과 10대 소아청소년 우울증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어 국가적 차원의 예방·치료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7일 서울경제신문이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에만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환자 수는 남성 16만 명, 여성 35만 명 등 총 51만 명으로 집계됐다. 연령대별로는 20~39세가 16만 553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60세 이상 16만 2643명, 40~59세 14만 9475명, 0~19세 3만 2165명 순이었다.
의료기관에 등록된 우울증 환자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23년 109만 821명이었던 우울증 환자는 2024년 115만 6055명, 지난해 118만 7695명으로 늘었다. 봄철 우울증 환자와 자살 사망자가 증가하는 이른바 ‘스프링 피크’가 아직 본격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 연간 우울증 환자는 120만 명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는 배경에는 입시·취업·승진 등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경쟁적 사회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젊은 시절 번아웃에 시달렸던 세대가 은퇴 이후 사회적 관계망 없이 고립되면서 고령층 우울증 문제 또한 심화하고 있다. 실제로 전체 우울증 환자에서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29.6%에서 올해 초 32%로 높아졌다. 이해국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고령화로 노인 인구 자체가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경로당을 제외하면 공공 차원의 오프라인 커뮤니티나 여가 공간을 찾기 어려워 일상에서 우울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소아청소년의 우울증 문제 역시 심각하다.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한 이른바 ‘4세 고시’처럼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 노출되는 환경이 확산한 영향이다. 20세 미만 우울증 환자 수는 2023년 7만 6350명, 2024년 8만 6254명, 지난해 9만 2655명으로 늘었다. 소아청소년은 환자 수에 비해 전문 의료기관이 부족해 초진 자체가 쉽지 않다.
서울에 거주하는 40대 직장인 B 씨는 최근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초등학생 자녀가 식사를 거부하고 등교를 꺼리는 등 우울감을 호소하자 대형 종합병원 소아정신과 진료 예약을 문의했지만 실패했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년 뒤에야 진료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기 때문이다. B 씨는 “소아나 청소년의 경우 수개월 전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사실상 초진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사후 치료 중심의 대응을 넘어 우울증 환자 발생 자체를 줄일 수 있는 예방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코로나19 시기에 초등학생·중학생이던 아이들이 현재 고등학생이 됐는데, 당시 신체적·정서적 연결이 단절된 데다 체육 활동이나 여가 활동처럼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도 줄었다”며 “예방 중심의 커뮤니티와 사교 활동, 정신건강 증진 활동에도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의원 역시 “청년과 고령층 등 세대별 맞춤형 지원을 강화하고 국민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