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류의 시간을 패션과 설치미술로 재해석한 전시가 경기 연천군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인류가 지나온 문명의 시간을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며 미래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패션이라는 언어로 질문한다. 자연과 문화유산을 잠시 물려받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시간의 손님’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경기문화재단에 따르면 패션디자이너 임선옥 파츠파츠(PARTsPART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29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전곡선사박물관 고고학체험실에서 ‘시간의 손님(GUEST OF TIME)’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한 장의 패브릭을 활용한 설치 작품이다. 원단을 여러 조각으로 재단하는 대신 원단 롤의 폭을 그대로 살려 역사적 인물의 초상과 문자, 기호 등을 디지털 프린트하고, 이를 호모 에렉투스 등 고인류 골격상 위에 드레이핑해 입체적인 군상으로 완성한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군상을 감쌌던 패브릭을 폐기하지 않고 실제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의복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하나의 소재가 원단에서 설치 작품으로, 다시 의복으로 역할을 바꾸며 생애를 이어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전시장에는 전곡선사박물관의 고인류 골격상을 활용한 약 170㎝ 높이의 군상 10개가 등장한다. 임선옥은 군상 위에 문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인물의 초상과 문자, 이미지를 겹쳐 놓는다. 오래된 인류의 몸과 후대가 기억하는 얼굴을 한 공간에 배치해 육체는 사라져도 생각과 이미지, 질문은 시대를 넘어 남는다는 의미를 표현한다. 이는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거나 위인을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선사인을 미개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역사적 인물을 영웅과 악인으로 단순화하는 태도, 인간이 자연과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에 질문을 던진다.
전시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시대를 연결하는 ‘시간의 식탁’이 설치된다. 인간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해 온 행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식탁에는 ‘우리는 진보해온 것인가, 단지 더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인다. 주변에는 기원(ORIGIN), 지식(KNOWLEDGE), 권력(POWER), 진보(PROGRESS), 책임(RESPONSIBILITY)을 주제로 한 다섯 가지 질문이 이어진다. 관람객은 군상과 식탁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또 한 명의 ‘시간의 손님’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된다.
10월 1일 공식 오프닝 행사에서는 ‘시간의 식탁’이 실제 향연의 장소로 전환된다. 채집과 불의 사용, 음식의 가공과 공유 등 인류의 오래된 식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식을 선보인다. 오프닝 이후에는 음식이 놓였던 자리에 패브릭과 오브제를 다시 배치해 소비 이후 남겨진 흔적까지 전시의 일부로 삼는다.
전곡선사박물관에 따르면 임선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획 단계부터 전시 방향과 작품 제작방식을 박물관 측과 함께 발전시켜 왔다고 한다. 박물관이 선사유산을 통해 인간과 자연, 몸과 환경, 현재와 미래 세대의 관계를 조명한다면, 임선옥은 의복의 완성된 형태뿐 아니라 재료의 사용과 생산과정, 제작 이후의 생애까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다뤄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제작·설치·해체 과정의 폐기물을 줄이고 무봉제와 재사용 방식을 활용하는 지속가능한 제작 프로세스를 핵심 요소로 설정했다.
임선옥은 2024년 대한민국 패션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 국립한글박물관, 광주비엔날레 등 문화예술 분야와 협업하며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